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작성일 : 16-01-07 10:30
일제강점기 죠세이(長生)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수몰희생자 위령제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9,417  
   죠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위령재.pdf (1.9M) [41] DATE : 2016-01-07 11:06:57

죠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위령제



〇 취 지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위치한 조세이탄광에서 수몰사고로 희생된 183명(강제징용 조선인 136명 및 일본인 포함)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민족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유가족들과 함께 위령행사를 진행하며, 일본 우베시에 탄광 수몰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매몰되어 있는 유골발굴을 촉구코자 함


〇 개 요

  -. 행사명 : 일제강점기 죠세이(長生)탄광

  -. 행사명 : 일제강점기 죠세이(長生)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수몰희생자 위령재

  -. 일  시 : 2016년 1월 30일(토) 10:40 ~ 12:00

             여행일정 ; 1월 29일 ~ 30일 (1박 2일)           

  -. 장  소 : 일본 야마구찌현 우베시 조세이탄광 추모비 및 피아 앞 

  -. 내  용 : 유족 제사 및 희생자 위령천도재

  -. 참  석 : 총 130여명

          ㆍ 불교계 - 약 60명 (회원종단 45명, 불교의식 4명, 언론사 7명, 통역실무 4명 등)

          ㆍ 유족 16명

          ㆍ 일본 시민단체관계자 및 후원회원 40~50명

          ㆍ 시모노세키 및 히로시마 영사부 관계자 등

  -. 주  최 : 한국불교종단협의회ㆍ죠세이탄광희생자유족회ㆍ죠세이탄    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   





  

※ 참고자료


죠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 사고 개요

  죠세이탄광은 시모노세키 남쪽 61km(히로시마 서쪽 120km) 지점 야마구찌현 우베시에 있는 해저 탄광으로 1942년 2월 3일 오전 9~10시 경 갱도붕괴로 탄광이 수몰되어 183여명이 모두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희생자 중 136명(또는 137명)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조선인 징용자들이었으며, 이들을 감독하고 관리하던 일본인 47명도 함께 수장된 참극이었다. 희생자는 오늘날까지도 수몰된 갱도에 수장된 채로 유골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조세이탄광은 ‘조선탄광’을 일본인이 부르던 호칭으로 채탄광부의 대부분이 조선인 징용자들이었기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징용자들은 조선 각지에서 모여 부산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시모노세키로 왔으며, 탈출를 예방하기 위해 시모노세키에서 다시 배로 죠세이탄광으로 보내졌다. 죠세이탄광에 징용된 조선인들의 다수는 독신의 젊은 남성으로 3.6M 높이의 울타리로 둘러싼 숙소에 감금되어 감시와 통제 속에 채탄작업에 투입되었다. 한편 가족과 함께 일찍 이주했던 조선인노무자는 사택(일명 아리랑마을)에 거주하며 채탄작업을 했다. 독신자숙소인 합숙소에서는 감시를 뚫고 징용자들이 탈출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으며, 잡혀오게 되는 경우 심한 구타를 당했다. 탄광회사는 징용자들에게 지급하기로 한 임금을 강제로 저축시켜 탈출을 못하게 막았을 뿐만 아니라 용돈처럼 지급하던 약간의 현금조차도 일절 지급하지 않았다. 죠세이탄광은 사고위험이 너무 높고, 하루 12시간씩 2교대의 높은 노동강도와 해저탄광의 높은 온도, 비좁은 갱도에서 반라 상태로 채탄작업을 해야 하는 최악의 노동조건으로 유명해 일본인광부들은 외면하는 탄광이었다. 당시 우베지역에는 59개의 탄광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죠세이탄광은 석탄생산량이 3위였다. 이렇게 3위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조선인 징용자의 강제노역이 있



 죠세이탄광은 거미줄처럼 막장이 이어져 해저로 10여km 뻗어 있고, 갱도가 해저면에서 너무 얕아 지나가는 배의 엔진음이 들릴 정도였다 한다. 수시로 누수사고가 발생하는 등 위험성도 높아 사고가 예견되었던 곳이었지만, 탄광회사는 해저채굴 제한구역에서까지 석탄을 캐게 했고, 더 많은 생산을 위해 갱도를 지지하는 갱목 일부를 제거하는 등 안전수칙이 무시되었고, 이를 감독하는 행정기관 또한 이를 눈감는 등 안전수칙 무시가 빗어낸 ‘인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전쟁물자 생산이 급했던 제국주의 일본과 탄광회사는 채탄작업을 강행하였다. 


 마침내 1942년 2월 3일 오전 9~10시경 바다 한가운데 1,010m 지점에서 예견된 수몰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사고가 나자 당시 피아(바다 한가운데 환기와 배수를 위해 설치한 둥근 콘크리트 구조물)에서는 3일간 물기둥이 솟구쳐 올라왔으며, 갱도 입구 바닷가에는 오열하는 유가족들과 징용자들이 몰려나와 있



었지만, 희생자의 구조나 수습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수몰사고난 갱도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사람은 겨우 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후, 일제와 회사 측은 갱도 입구를 널빤지로 봉쇄하여 유가족의 접근을 막았으며, 서둘러 인근 서광사(西光寺)에 희생자의 위패를 마련하고, 일부 유족들에게는 위로금을 지급하는 등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사고 직후의 혼란한 틈을 타 함바에 있던 조선인 징용자 상당수는 탈출하여 일본 전역으로 흩어졌으며, 탄광 측이 작업을 재개하였지만, 미미한 생산량을 유지하다가 제국주의 일본의 패전과 함께 폐광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죠세이탄광 수몰사고는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 2개월 만에 터진 대형참사로 제국주의 일본은 국민적 사기저하를 우려하여 철저하게 은폐, 통제함으로서 이 사고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수몰사고에 대해 양심적인 우베시민들이 나서 조사연구를 시작하면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죠세이탄광이 있던 곳은 한적하고 조용한 바닷가마을로 변해 있다. 추도비는 약 70여평의 바닷가 주택을 매입하여 2013년 2월 건립하였으며, 이곳에서 매년 “죠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일본 시민단체)”과 “유가족회”가 추모제사를 지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는 이곳에서 200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피아가 남아있다.  





□ “장생탄광 수몰자 유가족회”


 현재 한국 내 유가족들이 확인된 희생자는 50~60명이 확인되었고,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 유가족들도 있다. 유가족들은 “장생탄광수몰자유가족회”를 결성하여 1993년부터 추모식을 매년 2월 3일을 기해 참사현장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유가족들은 일본 정부의 진상규명과 유골발굴, 정당한 보상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회장 김형수(부산 거주), 부회장 양현(대전), 사무국장 손봉수(서울)






□ “죠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장생탄광 수몰사고가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순전히 한 일본인 선생님의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우베여고 역사선생님이었던 야마구치 다케노부(山口武信, 2014년 작고)씨가 1976년에 장생탄광 수몰사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조선인희생자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후 누노비키 히로시, 나가사와 시게루 등의 연구작업이 이어졌으며, 이러한 조사연구 작업을 토대로 “장생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라는 시민모임을 1991년에 결성하고, 야마구치 다케노부씨를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시민모임은 지속적인 연구조사사업과 희생자 유가족을 찾아내고, 추모비 건립을 위한 활동과 이를 위한 성금모금, 유가족들을 사고현장으로 초청하여 1993년(24년째)부터 추모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수몰사고의 전모를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노력에 앞장서고 있다.

 사고현장에 추도비 건립 추진사업은 탄광 소유주 후손이 땅을 팔지 않아 200m 떨어진 곳에 주택을 매입하여 오늘과 같은 추모공간을 마련하였다. 이 추모공간은 한국정부나 일본정부의 도움없이 일본인 회원들의 회비와 기부금을 18 년 동안 모으고, 야마구치 회장은 은행대출까지 받아가며, 총 3,000만엔을 들여 마침내 2013년 2월에 추모비를 제막하였다.

 “우리 일본인이 저지른 짓입니다. 스스로 반성하기 위해 이러한 활동을 해 왔고,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일제 침략주의의 사실을 제대로 인식시키는 것이 한일 양국의 우호와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 확신합니다.” 시민모임을 주도하고 후원하는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마음이다.

 현재 시민모임은 기존사업들과 더불어 유골발굴을 위한 노력에 진력하고 있다. 하지만, 유골발굴은 너무나 많은 비용과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사업이기에 시민모임만으로는 할 수 없는 사업이기에 한일양국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현재 공동대표3인 우치오카 사다오, 이노우에 요우코, 카무라 미치에 / 사무국장 오바타 태사쿠 / 사무실 록교교회(우베시내)